1천명의 펀드레이저를 만나다

1000명의 펀드레이저를 만나다 -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

Smartraising 2012. 2. 7. 10:07

 

제 4 호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 vacationjin@empal.com

 

 

 

 

 

 

  • 민족문제 연구소 활동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신 거죠?


대학 2학년 민족문제 연구소를 알게 되었어요. 제가 가난한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학과를 들어가긴 했는데 막상 보니까 일제 강점기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더라고요. 사회적 분위기가 사회 민주화에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독재 정권(노태우 시절) 역사에 대해서는 대학의 세미나나 학습 동아리 등에서는 많이 배우고 하는데 친일에 대해서는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는 거예요. 운동권 동아리 내에서도 크게 관심은 없는 편이었고요. 의제 자체가 독재 타도에 맞춰 있고 하다 보니 친일 문제는 주요 관심 영역 밖이었던 같아요. 이런 분위기에서 91년도 반민족문제연구소가 설립되고, 나부터 관심을 갖자 라는 생각에서 자연스럽게 자원봉사활동으로 참여하게 되었죠.

 

  • 학생 운동 시절의 관심과 자원봉사 활동이 직업으로 이어진 거네요.

. 대학교 졸업 하고, 제대한 후에 1998년에 정식으로 일하게 되었어요. 그때 연구소 상황이 힘들 때였거든요. 91 설립 후에 '친일파 99(돌베개)' 같은 대중서도 내고 하면서 기관 이름을 알려지고 회원이 천여명 정도까지 성장했는데 98년도에 입사할 보니까 이백 정도로 줄어든 거예요. 후원도 끊기면서 굉장히 어려울 때였죠. 민족문제연구소의 성격이 연구하는 단체이기 때문에 연구를 하려면 자료조사도 해야 하고, 자료도 사야 하고 하니까 회원과 후원이 없으면 운영이 되는 단체거든요. 그런데 후원이 끊기니까 너무 힘들어 거죠.

 

  • 그렇게 회원이 줄고 후원금이 이유가.

IMF. 연구소의 기본적인 후원자들은 부자들이 아닌 바로 셀러리 맨들. 그분들이 IMF 직격탄을 맞아 후원을 없었던 거예요. 때만 생각하면 생각나는 분이 있어요. 연구소의 회원이셨는데 당시 상업은행에서 정리해고를 당하신 분이세요. 그분이 자기가 근무했던 은행 정문 앞에서 호떡 장사를 하셨대요. 이게 무슨 원한을 가지고 하신 아니라 정말 생계를 위해서, 그래도 아는 사람들이 있어야 없어도 팔아주니까 앞에서 장사를 거죠. 그분이 그때를 회상하면 항상 생각이 나요.

 

  • 회원 분들은 어떤 성향을 가진 분들이었나요?

회원들의 성향을 따져보면 87년을 거치면서 자각한 시민들. , 최초에는 한겨레의 주주들이었고, 2002년에는 우리 대통령을 만들겠다고 돼지저금통을 모았던 분들. 그분들이죠. 세상을 바꾸는데 돈을 모아야 . 내가 못하지만 있는 사람에게 돈을 모아주겠다는 진정한 의미의 사회 운동으로써 기부를 하였던 분들이 연구소의 회원들이라고 봐요. 그런 면에서 한겨레 시민주주운동의 성과를 통해 많은 시민 운동 단체가 혜택을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표현하고 자기 돈으로 해보겠다고 했던 것이 한겨레가 처음이었거든요. 한겨레는 사실 기부금을 모아 언론사를 만든 거니까요.

 

  • 민족문제연구소에 입사해서 제일 먼저 했던 활동이 어떤 것이었나요? 당시 민족문제연구소가 다시 일어나게 활동이 있었죠?

. 저희가 계속 친일문제를 제기하고 있던 중에 이화여대에서 '김활난' 만든다고 했어요. 세계적인 여성 노벨상을 만든다고 거죠. 김활란이면 여성 인사 중에 대표적인 친일 인사인데 민족문제연구소가 당연히 반대 운동을 했죠. 98 8월인가부터 해서 이듬해 5월까지 이름도 없고 가난한 작은 단체가 이화여대를 상대로 싸우고 상을 무산시켰어요. 그러면서 회원들이 복구가 되었어요. . 다시 싸우고 있구나. 다시 도와야겠구나 싶은 생각이 드신 거죠.

그때 가장 도움을 것이 딴지일보예요. 당시에 PC통신이 아직도 대세였는데 딴지일보에서 인터넷으로 사진도 섞어가면서 장문의 기사를 써주고 하면서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준 거죠. 그러면서 기존 회원도 복구가 되었지만 신입회원도 많이 유입이 되었어요.

 

  • 이화여대 건도 그렇고 민족문제연구소 하면 논쟁의 중심에 서는 때가 많죠? 약간 노이즈 마케팅 아니냐 싶을 때도 있고.

 

. 이화여대랑 투쟁하면서도 그랬는데, 여자대학을 공격하냐? 다른 대학도 친일파가 많은데 여자대학이니까 만만하게 본거냐. 하는 시각도 있고요. 뿐만 아니예요. 남녀문제부터 해서, 학벌 문제, 민족주의를 바라보는 시각까지. 친일 역사 문제는 문제의 성격 항상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의도 하지 않았어도 말이죠.

 

  • 그런데 얘기 나온 것처럼 민족문제연구소 하면 "마초 아니냐"하는 시각이 있는 맞잖아요.

     

그렇죠. 대표적인 피해자가 전데요. 저를 모르시는 분들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사무국장이라 하면 50 이상 연배의 고집 있는 남성일 것이다 라는 생각들을 가지고 계세요. 하지만 저희가 과격한 활동을 때가 많아도 기본적으로는 일제강점기를 연구하는 연구소이고 대부분의 인력이 연구자인 연구조직이에요. 저희 직원들의 성비도 50% 이상이 여성 연구자들이고요. 아마도 역사문제를 바라보는 사회적인 인식이 남성 중심적이다 보니까 어쩔 없이 그렇게 부분도 있는 같아요. 기왕에 비영리단체에 회원이 되고 기부를 한다면 여성들은 환경이나 복지, 아동 문제에 관심이 가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니 남성 중심으로 그렇게 측면이 있는 거죠. 회원 성비를 보더라도 여성 회원은 10% 안되거든요.

 

  • 역사 문제에 있어 남성 중심적이라는 구체적으로 어떤 걸까요?

     

예를 들어 저희 연구원 중에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분이 하시는 말씀인데요. 학교에서 일제시대 독립운동 했던 인사 중에 유관순 말고 여성을 대봐라 하면 명도 말한다는 거예요. 학생뿐 아니라 일반인들 그렇지요. 그러나 저희 연구소서는 어느 단체보다 여성 독립운동가를 찾고 알리는데 열심인 단체예요. 그런 것은 역사 연구와 역사 문제를 저희 단체의 정체성과 연관해서 가지게 되는 오해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 ......그럼 회원 구성에서 연령대는 어때요? 연배가 많은 분들이 많지 않나요?

     

회원 연령대는요. 학번으로 따지면 88학번이 제일 많아요. 아무래도 87 영향을 받은 분들이 시민운동에도 관심이 많게 되었던 거죠. 87년에 대한 부채 의식 같은 것도 있고요. 참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도 있을 것이고요. 그리고 88학번을 꼭지점으로 거의 피라미드예요.

 

  •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회원들의 연령대가 젊으시네요. 그럼 40 전후 회원이 제일 많다는 거잖아요. 그럼 굉장히 젊은 회원 기반을 가지고 있는 단체잖아요.

     

. 다들 그런 말씀 하시고 놀라세요. 그런데 분들이 단체의 활동에는 못나오세요. 생활에 쫓기고, 한참 직장에서도 바쁘시고 하니까요. 그러니까 저희가 투쟁을 하거나 때는 아무래도 나이 드신 회원 분들께서 많이 참석하시게 되죠. 그리고 가정이 있으신 여성분들이 참석하시기도 어렵고요. 그래서 외부 분들이 현장의 모습을 보시고, 민족문제연구소는 나이든 남성들이 주로 참여하는 조직이 아니냐 하는 시각을 갖게 되시는 거죠.

 

  • 그렇네요. 오해가 있을 밖에 없군요. 기왕에 조직 이야기를 했으니까요.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방 조직도 꽤 있죠? 어떻게 운영 되고 있는 건가요?

     

지방조직은 회원 조직이에요. '후원은 기본, 실천은 옵션' 그러니까 서울에서는 연구하시는 분들이 중심이 된다면, 지방에서는 회원들이 연구를 없으니까 이슈가 있으면 활동하시고, 회원들이 모여서 친목도 도모하시고 하는 거죠. 그러다 보니까 지방 조직은 지부장의 역량에 따라 활성화 여부가 좌우되죠.

지방조직과는 연구소 직원과의 접촉이나 소통, 회원 활동. 이런 때문에 고민이 많긴 해요. 저희 연구소는 연구기관인데 연구원들이 회원들과 계속 어울리는 데는 한계가 있을 밖에 없고, 회원들 입장에서는 연구소에서 뭔가를 하기는 하는데 회원들이 참여할 만한 것이 많지 않다고 느끼고, 특히 활동이 지방에서는 피부로 닿지 않는다는 불만이 많고요. 그래서 연구소에서 지금 추진하는 박물관(민중생활역사관) 의미가 있을 같아요. 박물관은 회원들이 개입할 여지가 많고 무슨 활동을 하는지 회원들에게 구체적으로 보여주게 되니까요.

 

  • 지금까지 연구소 활동에서 지금까지 핵심은 친일 인명 사전이었잖아요. 여기에 회원들이 참여할 것이 많지 않았나요?

물론 친일 인명 사전이 지금까지 연구소의 핵심 사업이었고, 수년 동안 사업을 위해서 매진한 것은 맞죠. 그런데 회원들이나 기부자들이 연구소의 사업으로써 참여할 때는 역할이 크지 않은 거죠. 일단 인명 사전을 제작하는 데는 회원들이 참여하기 쉽지가 않고요. 아무래도 연구자들의 몫이 크니까요. 결국 인명사전이 만들어진 다음에 구매해주는 것만이 분들의 역할인 거죠. 하지만 박물관 같은 경우에는 자기 집에 있는 사기 그릇을 내놓을 수도 있는 거고요. 집안에 가지고 있는 친일 관련 책이나, 유물을 내놓고 전시할 수도 있고요.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박물관에 와서 이야기를 있고, 연구소와 만날 있으니까요. 회원을 위한 공간이 있다고 보는 거죠.

  • 기왕에 박물관 이야기로 갔으니까 이야기를 좀더 해보죠. 박물관 건립을 위해서 초부터 본격적으로 준비를 하신 거죠? 건립을 위한 준비는 어떻게 하신 거예요?

     

먼저 중요한 것이 박물관 건립 비용일 텐데요. 저희가 친일인명사전 판매수익금은 경상비로 쓰지 않고 계속 적립을 하고 있고요. 지금까지 5 정도가 전액 박물관 건립에 쓰이도록 모아 놓고 있어요. 연구소는 회원의 회비로 운영되는 거니까요. 판매 대금은 아예 목적을 그렇게 정해놓은 거죠. 다음에 2억원은 송기인 신부님께서 기부하셨어요. 송기인 신부님은 노무현 대통령의 정신적 지주라고 불리시는 분이신데요. 분께서 노무현 정부 2년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셨거든요. 그때 받은 월급을 푼도 쓰시고 통장 채로 저희한테 기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모은 1억하고 해서 8 정도가 준비가 상태죠.

 

  • 송기인 신부님과 연구소는 원래 아시는 사이셨어요?

     

아니요. 그전에는 몰랐죠. 회원도 아니셨고요. 그리고 그분은 활동 무대가 부산이시잖아요. 그래서 서울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분이셨는데요. 저희랑 살갑고 그런 것도 없었죠. 노무현 정부 과거사 정리와 관련해서 저희 단체도 관여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정도고요. 그런데 위원장 하시고 1년쯤 지나서 저희 사무실에 비서랑 같이 오셨어요. 통장 들고. 그리고 식사도, 차도 한잔 하시고 통장 건네시고 가시더라고요. 그리고 1 있다가 한번 오셔서 통장 주시고요. 차곡차곡 월급 쌓여 있고, 이자도 쌓여 있고요. 그게 끝이에요.

 

  • 그렇게 해서 박물관 건립을 위한 준비 자금은 거네요. 이제 나머지 건립을 위한 비용은 시민 모금이나 기부를 통해서 마련하실 계획이신 거구요. 그럼 전시할 유물은 준비가 건가요?

 

. 박물관을 만들기 위해서는 세가지가 필요한데요.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그리고 사람 이라고 있죠. 박물관을 만들기 위한 소프트웨어라고 유물은 저희 창고가 넘칠 정도로 지금도 넘쳐나고 있고요. 학예사라고 불리는 사람이 필요한데, 그건 저희 연구소에 박사 학위 소지자가 운전면허 소지자보다 많으니까요. 충분하죠. 문제는 하드웨어라고 공간이 없다는 거예요. 물론 민족문제 연구소 안에 30 규모로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고, 박물관도 1 박물관으로 등록이 되어 있어요. 하지만 좋은 위치에 좋은 공간으로 안정적으로 전시하고 연구할 공간을 마련할 것이 필요하죠.

  • 박물관 사업이 연구소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굉장히 크겠네요.

     

그렇죠. 연구소의 번째 사업으로써 인명사전을 만드는 것이 20 걸렸는데요. 사업은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사업이었다고 한다면, 번째 사업이라고 박물관 건립은 눈으로 보이는 구체적인 사업이라고 있죠. 인명 사전을 만들었던 아버지가 아들의 손을 잡고 와서 함께 하는 장소가 것이고요. 회원들과 소통하는 장소가 것입니다.

 

  • 민족문제연구소의 재정에 도움을 주는 사업은 어떤 것이 있나요? 일단 연구소를 가장 많이 알린 대중서 발간과 친일 인명 사전 발간 사업이 있겠죠?

     

연구소 설립하고 초창기에는 대중서 발간을 통해 단체가 많이 알려졌죠. 사실 대중서 발간은 친일인명 사전 발간을 위한 맛보기라고 있어요. 이제 인명 사전이 발간 되었으니 인명 사전을 분야에 맞게 해체해서 작업 되어야 것입니다. 수익 측면에서 대중서의 경우 만화 물에서는 수익도 나고 했는데 여타 대중서는 재정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친일 인명 사전 같은 경우는 개인 구매자가 대부분이예요. 후원한다는 마음으로 구매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친일 인명 사전을 구매하시는 분들은 기부자라고 생각해야 것입니다. 저희도 감사의 마음으로 친일인명사전 부록에 후원자들의 명단과 친일파의 명단을 함께 수록하였습니다. 친일파의 명단과 후원자들의 명단을 나란히 보면서 부여되는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 민족문제연구소의 회원과 기부금이 폭발적으로 늘었던 때가 있었잖아요. 얘기도 해보죠.

 

그게 2004년도였어요. 전해까지 정부에서 친일파 연구 프로젝트를 하면서 연구비로 2억원 정도를 지원 받았는데요. 2003년도 예산을 심의하면서 한나라당이 전액을 삭감한 거예요. 그래서 오마이뉴스와 함께 내용을 알리고 정부에서 삭감한 연구비를 국민의 힘으로 모아달라는 모금 운동을 진행했지요. 18일부터 모금운동을 들어갔는데 120일까지 12일만에 5억을 모금했습니다. 25,000여명이 참여를 했죠. 중에 10% 정도가 연구소의 회원이 되었고요. 연구소 회원이 2천명에서 4천명으로 늘어났죠. 정말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기부금이 얼마나 많이 들어오는지 통장 정리를 못할 정도였으니까요. 안타까운 것은 그때 후원하셨던 분들 중에 연락처도 없이 통장에 이체만 해주신 분들께는 감사의 전화 통도 드렸다는 것입니다. 조만간 그분들께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신문 광고 등을 하려고 기획 중입니다.

 

  • 결국 민족문제연구소의 펀드레이징은 사회 운동과 떨어질 없는 것이네요.

 

그렇죠. 연구소는 사회 운동을 통해서 성장하게 되었다는 생각이에요. 각종 시위를 하고, 지나고 나면 회원이 늘거든요. 유물구입이나 연구원의 논문 발표 보다는 시위가 회원들에게 어필하고 있어요. 결국 연구소는 연구와 실천의 바퀴로 가고 있다는 것이죠. 전에 그런 질문이 많았거든요. 인명 사전 만들면 연구소 일은 아니냐?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역사는 현실이고 앞으로 전면적으로 부딪힐 일들이 남아 있다. 때까지 민족문제연구소의 일은 너무 많이 남았다고 말씀 드리고 싶네요.

  • 이제 마지막 질문인데요. 현재 국장님께서 기부하고 계신 단체는 어디가 있을까요?


오마이뉴스 십만인클럽, 참교육학부모회, 수원시민신문, 민중의소리, 노래패 우리나라 입니다.

 

  • 오늘 감사했습니다. 단체의 활동과 펀드레이징과의 올바른 관계에 대해 배워본 자리였습니다.

 

20년 연속기획 1천명의 펀드레이저를 만나다

인터뷰어 [interviewer] : 방성진 (도움과나눔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