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천명의 펀드레이저를 만나다

1천명의 펀드레이저를 만나다 - 서울프린지네트워크 송추향 펀드레이저

Smartraising 2012. 2. 7. 09:53

 

1천명의 펀드레이저를 만나다

서울프린지네트워크 송추향 펀드레이저 wowfish@naver.com

 

[문화잡지 보일라] 기자, [희망제작소] 연구원, [아름다운가게] 매장매너저를 지냈다. 자급자족을 꿈꾸는 생활문화기획자, 비주류문화발전소라는 1인조직의 유일한 멤버이다.

 

서울프린지네트워크는 독립예술 창작 활성화와 창작교류를 지원하는 전문예술단체로 매년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있다.

홈페이지 www.seoulfringe.net

블로그 blog.naver.com/hellofringe

페이스북 www.facebook.com/seoulfringefestival

트위터 @seoulfringe

 

  • 어떤 호칭이 편할까요?

송추향 씨가 좋지 않나요? 저희 프린지는 직위가 따로 없어요. 저희 직원이 11명 정도 되는데요. 조직 내에서 대표만 있고 다른 사람들은 하는 일만 다를 뿐이지 모두 동등한 관계로 일하고 있어요.

 

  • 프린지네트워크는 어떻게 시작된 거죠? 프린지네트워크라는 이름도 궁금합니다.

    98년에 '독립예술제'라는 이름으로 대학로에서 축제를 시작하면서 처음 만들어졌어요. 처음에는 그때는 사전 검열이 있을 때니까 행위 자체도 제약을 받을 때지만, 특히 국가에서 개최하는 행사나 축제가 아니면 예술가들이 공연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던 시기였죠.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 일체의 사전 검열이나 이런 것이 다 거부하고 예술가들이 자비를 들여서 축제를 해보자 해서 시작을 한 거죠. '언더그라운드의 반란' 이런 식으로 해서 한번이 될지 몇 번이 될지 모르고 시작을 했는데 한해 두해 하게 되고 행사가 커지고 하니까 사무국이 필요하겠다 해서 결성을 했고, 2002년에 서울프린지네트워크라는 이름으로 바꿨어요.

     

  • 지금은 축제 말고도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지 않나요? 재미난 게 많던데요.

    축제라는 것이 일회성이잖아요. 일년에 한번 축제를 하는 건데 조직은 지속되어야 하고. 그런 고민 속에서 일상적인 예술가 지원활동까지 하게 되었던 거죠.

 

  • 프린지가 생각하는 축제나 예술 지원이라는 게 어떤 거죠? 요즘 보면 예술 지원이라는 게 유행처럼 많잖아요.

    사실 제도권에서는 예술 하는 사람들이 니가 얼마나 훌륭한 작품을 썼니, 멋진 경력이 있니 하면서 제도권 이전의 활동들을 보여주지 않으면 들어오는 것을 원천적으로 허용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인정 받는 예술가들도 처음이라는 것이 있을 텐데, 그 '처음의 자리'를 우리가 마련해주라 하는 생각이 우리에게 있는 거죠. 그래서 일상적으로 공연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축제라는 이벤트를 통해서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들까지 누구나 자유롭게 참가할 수 있는 자리와 시간을 마련해주자는 게 목표예요.

     

  • 프린지 조직에도 14년동안 많은 변화가 있지 않았나요?

    98년에 축제에 참가했던 팀이 50개였거든요. 지금은 300개예요. 300개면 팀이니까 거기에 참가하는 사람으로 보면 몇 천명 정도 되는 거죠. 그리고 축제에 참가하는 관객이 저희가 통계를 내보니까 18만명정도 되는 거예요. 유무료 합쳐서요.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커졌죠. 그런데 98년이나 지금이나 사무국 인원은 그대로예요.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스텝의 대부분은 20대고요. 일한 시간도 3-4년차들이 대부분이고요. 뭔가 변화가 필요한 거죠. 이렇게 가면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모금에 대해서 고민을 더 했었죠.

     

  • 어떻게 도움과나눔을 만나게 된거예요?

작년(2010년)이 프린지로 보면 서울프린지네트워크라는 조직과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이라는 축제가 정체성을 각각 확립하고 프린지가 가질 수 있는 일상적인 활동을 안정적으로 가져가자는 고민이 많았던 시기였죠. 특히나 민간 축제 입장에서 재정이 항상 불안정했어요. 공공 영역의 재원이라는 것이 절반 정도를 차지하게 되는데 이게 매년 프로젝트 성으로 발생을 하는 거니까 혹시라도 잘못되면 수입이 뚝 끊기는 거죠. 게다가 민간 재원이라는 것도 대표가 혼자서 끌어오고 축제를 통해 충당이 되지 않으면 빚으로 남게 되는 식으로 불안하게 갔던 거죠. 그래서 이러면 어렵겠다. 뭔가 재정과 관련해서 안정적인 재정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겠다 싶어서 찾다가 모금이라는 방향을 찾아보자 싶었고, 그 와중에 예경을 통해 도움과나눔을 만나게 된 거죠.

 

  • 프린지에서 펀드레이저라는 위치는 어떤가요?

    힘들었던 것이 어린 친구들과 저나 대표 같은 30대 중반 이후 사람들간에 모금을 바라보는 시각이었어요. 간극이 꽤 크죠. 용기와 열정만으로 다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많은 20대와 현실은 거기에 플러스 알파, 즉 재정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생각의 차이요. 그래서 내부적으로 꽤 힘들었어요. 펀드레이저라는 자리가 그런 거 같아요. 내부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고 설명해야 하니까 생각이 다르면 외롭고 고립되기 쉬운 자리죠.

 

  • 축제가 더 커질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그런 재정에 대한 고민은 더 많아지겠네요?

    그런 연결 선상에서 조직 정비와 모금에 대한 컨설팅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축제가 커지고 하면 당연히 축제를 유지하기 위한 자본이 필요한 거잖아요. 그런데 프린지가 독립예술을 표방하면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그 자본에 대한 거부감이 많아요. 예를 들어 어떤 기업이 후원을 해줄 테니 회장님이 참석할 때 의자를 내달라고 했었는데요. 저희가 그랬어요. "이거 스탠딩으로 하는 거니까 의자를 내줄 수 없다고 말이죠. 그러면 후원하지 말라고." 부스 좀 내달라 하면 "우리 상업적으로 할 수 없다"고.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는 방어벽이 꽤 컸던 거예요. 그리고 자본의 힘에 대해서 대단히 많이 경계하고요. 그래서 여태까지 14년을 하면서도 모금을 하면서도 돈 보다는 열정이나 이런 것을 달라고 말을 해왔던 거죠. 그런데 이제 커지다 보니까 이제 돈도 필요한 거 아니냐? 하게 된 거죠. 저희가 2009년 축제를 마지막으로 그나마 있던 기업 후원이 다 끊어졌거든요. 완전 절박해진 거죠. 재원을 마련하지 못하면 축제를 못하겠구나.

     

  • 그 고민을 해결하는데 컨설팅이 도움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 예술경영 지원센터를 통해 모금컨설팅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꽉 잡은 거죠. 그렇게 컨설팅을 받아보니까 이게 너무 좋은 거예요. 일단 모금에 대해서 내부 사람들한테 설명할 꺼리도 생기고, 권위도 생기고. 그러면서 조직 안에서 같이 공감도 하게 되고요. 1차적으로 그게 제일 좋았던 거 같아요.

 

  • 그럼 프린지가 모금을 시작하신 건 얼마 안되신 건가요?

    물론 모금을 한 것은 축제 초기부터 계속 했었죠. 처음 1회 독립예술제도 구성원들이 돈을 서로 내서 축제를 만든 거니까. 그런데 지금까지 모금이라고 하면 대표의 업보처럼 대표가 알아서 돈을 끌어오는 그런 식이었던 거죠. 그런데 도움과나눔을 만나면서 그걸 조직의 차원에서 모금을 해보자 하는 것으로 바뀐 거 같아요.

     

  • 그럼 조직적인 모금을 하게 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뀐 거네요.

    여태까지는 우리 프린지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100명이면 100명이 모여서, 1000명이면 1000명이 모여서 이걸 만들면 된다 하는 생각이었다면, 지금은 프린지에 참여하는 방식이 꼭 예술을 직접 하는 방식이 아니더라도 재원이라든가, 인프라라든가 하는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바뀐 거 같아요. 그렇게 되면 공감이나 참여의 폭이 더 넓어지게 되는 거 아닌가 싶어요.

     

  • 제일 고마운 기부자는 누구예요?

    청소기 사주신 분? 사무실 옮겼는데 청소기가 필요해서 살까 말까 했는데 후원자 분께서 청소기를 딱 사다 주셨어요. 사소한데 관심 가져주는 기부자가 제일 고맙더라고요.

     

    • 나쁜 기억은……

    음……이거는 어디라고 밝힐 수는 없는데요. 어떤 기업에서 저희 대표님 개인 이메일로 "이제부터 안 한다" 하고 한 줄짜리로 띡 보냈어요. 화가 많이 났죠.

     

  • 왜 그러신 거래요?

    모르겠어요. 왜 그랬는지. 근데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우리가 후원자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몰랐던 거 같아요. 그런걸 남세스럽게 생각했던 거죠. 예를 들어 누가 밥이라도 먹어야 하지 않느냐고 하면 발끈 했던 거죠. "왜!" 하고. 예우라는 걸 몰랐던 거죠.

     

  • 기부요청에 대해 거절 당하신 기억이 있으시죠?

    네. 그런데 저는 있잖아요. 연애 할 때 고백을 하잖아요. 고백하기 전에 밤을 새서 고민도 하고 갈등도 하고 하다가, 일단 고백을 하면 그 다음부터는 상대방한테 숙제를 넘긴 거잖아요. 전 그런게 재미있는 거 같아요. 제안을 하기 전까지는 그게 저한테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고 그러는데, 일단 제안을 하면 거절을 하거나 오케이를 하거나 그 사람이 고민을 하는 거니까 속이 시원하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펀드레이저를 하면서 제가 몰랐던 저의 좋은 면을 발견한 거 같아요.

     

  • 그래서 몇 건이나 거절을 받으셨어요?

    올해는 거의 100% 거절을 당했어요. 저희가 3월부터 지금까지 기업 16곳을 제안을 했는데 답이 아직 안 온 것까지 포함해서 16곳 다 거절을 당했어요. 저희가 앞으로는 대중 모금 쪽으로 기부자를 가져가야 하겠다고 생각하는데, 올해는 일단 규모가 좀 필요하니까 기업으로 제안을 넣어보고 있거든요. 그래서 2달 정도 기업으로 집중으로 하고 있는데 한 건도 성사를 못했어요. 그래서 방법에 변화를 좀 주려고 해요.

     

  • 내 인생의 첫 번째 펀드레이징을 얘기해주세요.

    저는 펀드레이저라는 역할이 처음부터 낯설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제가 대학생 때 무전여행을 하면서 여행경비를 모금했었거든요. 그 때 한 40만원쯤 모금했었죠. 그리고 부산에서 '보일라'라는 문화 잡지 만들면서 광고 유치하고 이러면서도 모금이라고 생각했었고요. 첫 번째 펀드레이징이라고 하면 그때가 아닐까 싶어요.

     

  • 본인이 기부하고 있는 곳은 어디인가요?

    희망제작소, 인디다큐페스티발, 그리고 친구아이학비를 기부하고 있어요. 친구아이학비는 공동 육아라는 개념에서 후원하고 있는 거예요.

     

  • 어떤 펀드레이저가 되고 싶나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 자리가 펀드레이저라면 펀드레이저를 계속 하고 있을 거 같고요. 그런 역할에 충실한 일을 하고 있을 거 같네요.

     

  • 나는 OO 하는 펀드레이저다 라는 정의를 해볼까 하는데요.

    나는 Fun, Unit, Network, Development Raiser 이다

    나는 재미,도구,관계를 개발하는 펀드레이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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